국내여행/전라남도

전남 강진 여행 정약용의 사의재

워크뷰 2018. 12. 8. 08:00

전남 강진 여행 정약용의 사의재


사의재기  정약용 

사의재라는 것은 내가 강진에 귀양가 살대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고 한다. 

마땅하다는 것은 의롭다는 것이니 의로 제어함을 이른다. 

연령이 많아짐을 생각할 때 뜻한 바 학업이 무너져 버린 것이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때는 가경 8년(1803, 순조 3) 겨울 12월 신축일 초열흘임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 순조 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 건괘를 읽었다. 



사의재 안내 

한자가 발명된 이래 최고 시대의 사상가(위당 정인보의 평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강진에서 내리 18년(1801~1818)을 살았다. 

이곳 사의재는 다산이 처음 도착해서부터 만 4년간 기거하던 역사 공간이다. 


조선시대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던 개혁군주 정조대왕(1752~1800)은 정약용을 극진히 신임하였다. 

"그대밖에 없다. 문장에서도 그대 능가할 자 없고, 100년 만의 제상 제목 그대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 정조가 세상을 뜨자 당파싸움으로 시종하던 조정은 종교 신앙 문제를 표면적 까닭(황사영백서사건-신유사옥)으로 

피비린내 나는 정적 제거에 나서고, 이 와중에 정약용 일가는 일직이 들어보지 못한 끔찍한 수난의 희생물이 된다. 


형(정약종)과 형수(문화 유 씨)와 매형(이승훈)과 조카들(정철상, 정정혜)과 조카사위(황사영)가 한꺼번에 몰살당한다. 

그리고 자신은 또 다른 형(정약진)과 돌아온 기약 없는 머나먼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사의재는 슬픈 곳이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임금 사랑은 한 몸에 받던 충신의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어버린 가문과 생이별하는 대역죄인으로 내몰린 이가 

낯설고 물 설은 곳에 도착해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처음 의지한 곳이 사의재였다. 


사의재는 조선 개혁정신의 상징이자 실학의 정점이었던 고독한 선각자가 유배생활을 시작했던 슬픈 곳이지만  

동시에 다산 정약용의 장엄한 첫 성지이기도 하다. 

강진군은 오랜 고증을 거쳐 선생의 손때와 눈물과 회환과 좌절과 꿈이 숨 쉬듯 생생한 이곳 동문 안쪽 우물가 주막 집터를 원형 그대로 

2007년 초여름 복원하다.


사의재

전화번호 : 061-433-3223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4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