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영정은 오랫동안의 청렴한 관직 생활을 마치고 나이 들어 고향에 지내고 있는
지지당 송흠(1459~1547) 선생의 편안한 여생을 위하여 중종 임금이 전라도 관찰사를 시켜 지어준 정자입니다.
정자는 1543년 중종 임금이 새로 부임하는 전라도 관찰사 규암 송인수(1499~1547)에게
'85세의 송흠을 위해 정자를 지어주고 큰 잔치를 베풀라'라느 어명으로 용암천 옆에 세웠습니다.
1544년 이곳에서는 나주 목사 조희의 주관 아래 송흠 선생을 위로하고 정자 건립을 축하하는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이 자리에는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 나주, 영광, 장성, 진원 등 주변 10개 고을의 수령, 지역 선비, 백성 등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모였으며, 처용무, 관음찬, 공던지기 기예, 뱃노래 등의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화재로 없어졌으나, 1856년 송인수 선생의 10세 후손 송겸수가 영광 군수를 하면서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영정의 기는 70세 노인을, 영은 가장 빼어난 풀을 의미하므로
'나이 많고 덕이 높은 노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성에서는 학문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기 때문인데요
조선 시대만해도 송흠, 박수량, 김인후, 김경수, 기효간, 윤진, 변이중, 기정진, 기삼연 등이 있으며
이들 중에 가장 으뜸은 지지당 송흠입니다.
그 이유를 들라하면 50여 년간의 벼슬 기간 중 청렴결백을 실천하였으며,
99살 노모를정성스럽게 모시기 위하여 77세에 전라관찰사를 사직하였으며,
호남 사림의 튼튼한 맥을 잡아준 사람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기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바닥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되어 있습니다.
낮은 외벌대의 돌 기단 위에 큰 덤벙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습니다.
대청주위에는 낮은 평난간을 돌렸습니다.
기영정은 현판이 두 개인데요.
하나는 송인수의 후손인 송겸수가 쓴 기영정 글씨이고 다른 하나는 신석희가 쓴 현판입니다.
기영정 마루에서 보는 용암천의 모습
편액이 두편 걸려있습니다.
내용이 궁금하여 찾아보니 좋은 자료가 있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湖海維靈有我候호해유령유아후
一生氷壁苦淸修일생빙벽고청수
主恩稠疊連褒賞주은조첩연포상
孝意純深數乞州효의순심수걸주
架揷二三千卷帙가삽이삼천권질
年高八十六春秋연고팔십육춘추
耆英亭上成佳會기영정상성가회
移入丹靑萬世留이입단청만세류
호해의 영지에 우리의 선비가 있어
일평생 청렴하여 곤궁에도 안주하였네
임금의 성은이 겹침에 포상이 연이었고
효심은 깊어 고을에 있기를 수차 원했네
서가에는 수 천권의 책이 꽂혀 있고
연세는 높아 지금 86세 춘추라네
기영정 위에서 좋은 잔치를 자주 이루고
이 단청에 옮겨서 만년을 누리소서
규암 송인수의 시 원운(元韻)
지지당 송흠의 잔치를 기리기 위하여 칠언율시를 지은 것이 기영정 원운입니다
위의 글은 장성군청 문화관광 역사인물기행 김세;곤님의 게시글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http://www.jangseong.go.kr/home/tour/spectacle/person_tour/person_tour_04
기영정 뒷편으로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보았습니다.
약간 높은 단같은 곳에서 기영정을 바랍뇌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효를 실천하고, 청백리의 삶을 살았으며, 호남사림의 아버지인 송흠을 이곳에서 만나고 갑니다.
기영정
전남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 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