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행 장성 박수량 백비 전남기념물 제198호
백비?
백비가 무엇일까 궁금하여 찾아간 장성 박수량 백비!
백비는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상태의 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묘지의 비석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니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가 궁금하여집니다.
우리는 묘원에서 많은 묘비에 적힌 글을 보게 됩니다.
살아생전 공적을 적어 놓거나 또는 기독교인들의 천국 소망 성경구절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그리고 외국의 유명한 묘비에도 흥미를 유발하는 글이 적혀 있는데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며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인 천상병의 묘비명입니다.
오늘 찾아간 박수령 묘비명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습니다.
묘비명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니 상당히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장성 박수량 백비를 찾아가는 길은 장성 홍길동 테마파크에서 1.4km 떨어져 있습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넓은 주차장이 있어 대형버스도 주차하기 편리하며
소박한 기념관과 묘소로 올라가는 길 안내판이 보입니다.
먼저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명종 임금께서 백비를 세우게 한 말이 적혀 있습니다.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빗돌에다 새삼스럽게 그가 청백했던 생활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고 말하였습니다.
조선의 청백리 제도에 관하여 설명하여 놓았는데요
청백리란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가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 의해 선발되어 청백리안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청백리는 죽은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염근리, 혹은 염리라고 불렀으며, 깨끗하고 유능한 관리를 뜻합니다.
청백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으며 인의가 넘쳐야 합니다.
청백리의 유래는 청백리를 선발하고 표창하는 일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한나라 문제 12년(168년)에 염리를 선발하여 표창하고 곡식과 비단으로 상을 준 것이 처음입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시대부터 청백리를 표창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총 218명의 청백리가 선발되었습니다.
박수량의 시호는 정혜공
시호는 청백수절의 정자와 애민호요의 혜자가 합해진 정혜공으로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 선생의 공직생활상을 시호로도 알 수 있습니다 1805년(순조 5) 시호가 내려집니다.
감사원이 선정한 조선시대 3대 청백리는 박수량, 황희, 맹사성이 있습니다.
일화를 보면
김개 선생의 수제자로 12살에 고부에서 망해부라는 글을 지어 12살 나이에 장원을 하신 신동이라고 알려진 어른입니다
문과에 출사 하여 관직에 나간 이후 작은 벼슬을 많이 거치고 참판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무조건 3년 상을 치러야 했습니다.
박수량이 참판 시절 고향에 내려와 상인 생활을 하는데, 상인답게 생활하지 않고 호의호식을 한다는 허위보고가 되어, 조종에서 암행어사를 보내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암행 어사가 내려와 사실을 확인하고 여렵게생활하고 있는 박수량에 대해 조정에 다시 보고가 됩니다.
당시 명종이 쓴 편지가 있습니다.
또한 명종은 백비와 청백당을 내려 주었는데 백비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이유는 그의 청빈한 삶과 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백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청백리 시 정혜공 박수량 선생 백비 입구라는 표지석이 서있습니다.
돌로 만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울퉁불퉁한 느낌을 그대로 받으며 청백리의 삶에 대하여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합니다.
깨끗하게 단장된 묘에는
정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비가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벅수량의 묘를 비추는 햇살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백비 추자창에는 호산재가 있는데 이곳은 밀성 박씨 재실입니다.
박수량 선생의 백비를 보았는데 근처에 있는 생가를 방문하지 않을 수 없죠
그래서 생가로 향합니다.
생가는 홍길동 테마파크에서 관동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우측에 안내 표지판이 보입니다.
이 표지판을 따라 오르면 넓은 주차장과 함께 아곡 박수량 선생 생가가 나타납니다.
생가 안내판은 읽기가 상당히 불편하게 제작되어 있습니다.
최신 안내판으로 다시 교체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후순들은 선생의 생가였던 이곳에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 형태의 부조묘(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받는 신위)와 재실을 짓고 청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선생의 청렴정신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