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은 일제 강점기 의병활동의 거점이자 3·1운동 당시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충렬의 고장" |
일제 강점기 하동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과 지역 항일투사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하동독립공원
항일독립운동하면 선열들의 우국충정이 가슴을 울립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현재의 풍요로움이 어디에서 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할 때입니다.
수탈의 역사인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선조들은 먹을것 입을것 모두 일제에게 수탈당하고, 심지어 아들 딸까지도 수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기나긴 시간 너무나 힘들었던 시간 그러나 우리선조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가슴에 맺힌 아픔을 독립운동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혈성단을 비롯해 대동청년단, 중국 상해 청년동맹회, 지리산권 의병활동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항일독립투사가 나왔읍니다.
특히 박치화 선생을 비롯한 지역 인사 12명은 1919년 3월 18일(음력 2월 17일) 하동장날을 맞아
자체적인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하동지역 3·1독립만세운동 효시로 기록됩니다.
당시 적량면장이던 박치화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는 하동읍 장날에 맞춰 거사를 준비하였으며,
장터에 도착한 박치화는 태극기를 장대에 달고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
자신이 직접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품에서 꺼내 낭독한 이후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경성이 아닌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작성해 낭독한 사례는 하동독립선언서를 비롯해 2~3개에 불과하다고 전해집니다.
선언서 낭독 이후 일대 군중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더니 시위 인파가 이내 1500명을 훌쩍 넘겼으며.
위기를 느낀 일본 경찰은 군중을 즉각 해산하고 박치화 면장을 검거했습니다.
이날 만세 이후 양보면 장암리 일진학교 교원 정섬기는 같은 마을 정성기와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논의했으며.
양보면 우복리 정이백, 고전면 성천리 이경호 등을 규합해 다음 하동 장날인 23일 수백 명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펼쳤습니다.
4월 7일에는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 박문화, 염삼섭, 정점금, 전석순 등 130여 명이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학교를 뛰쳐나와 하동장터를 향해 구보로 독립만세 행진을 진행했습니다.
이 같은 독립 만세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북천과 옥종, 고전, 청암, 화개, 진교 등 하동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금남면 출신 정낙영과 이범호, 정희근 등은 남해읍에까지 가 만세 시위를 주도습니다.
하동지역 독립만세가 특별한 점은?
특히 하동지역 독립만세는 비단 국내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이곳 유림 정규영 선생은 1919년 파리민족평화회의에 보내는 대한독립선언문인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국 유림대표 137명에 이름을 올렸던 것입니다.
아들 정재완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을 주도하는 등 전 재산을 항일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우리 선열들의 이러한 피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성장하게 하여준 우리의 선열들의 희생을 잊으선 안되겠습니다.
하동독립공원 맞은편으로 하동공원이 보입니다.
하동독립공원 4천620㎡의 부지에는 선열들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높이 8.5m의 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독립선언서 비석, 하동 출신 독립운동 서훈자 52명을 새긴 조형석이 세워졌습니다.
하동우체국에서 하동독립공원으로 올라가는길에 보았던 벽화입니다
섬진강의 나룻배와 섬진강변의 벚꽃이 아름답게 표현되었습니다.
정자의 마루가 너무나 깨끗하여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물걸레질을 하시는 분이 계시는가 봅니다.
청소를 하고 난후 걸레를 말리는 모습인데 물걸레가 새젓처럼 깨끗합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이곳 하동독립공원 가꾸는이의 정성이 담긴 손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동독립공원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던 그날을 다시 그려봅니다.
고맙습니다, 선열들의 우국충정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동독립공원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