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도보 여행/역사길

[자성대공원] 부산 앞바다를 지키던 부산진지성

워크뷰 2011. 6. 17. 15:52

부산 앞바다를 지키던 부산진지성

시내버스로 부산진시장에 내리면

부산의 전통시장 부산진시장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산의 역사적인 장소가 하나 있으니 그곳은 바로 부산진 지성(자성대공원) 입니다
자성대(子城臺)의 원래 이름은 부산진 지성(釜山眞 支城)입니다.
1592년 임진년때 이 고장을 침범한 왜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본래의 우리 부산진 지성을 헐고 그들의 방식으로 성을 쌓은 것입니다.
'임진년에 왜적이 부산성을 헐고 별도로 옛 성의 동남에 하나의 성을 쌓은곳입니다.

부산진 지성 서문 금루관 아래 "홍예식 문"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부산진지성의 서문인 금루관과 성곽 양쪽에 끼어 있는 돌기둥으로
원래의 서문 자리였던 현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는데
1975년 부산시에서 정화공사를 벌여
서문인 금루관을 복원함에 따라 현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부산진 지성 서문 성곽 우주석 "남요인후"
즉,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국경이라"란 뜻입니다.
높이 277㎝에 너비가 62∼71㎝입니다.


 부산진 지성 서문 성곽 우주석 "서문쇄약"
즉,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란 뜻입니다
높이 272㎝에 너비가 46∼94㎝,

우주석을 세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후 부산진지성을 다시 쌓을 때 세운 것으로 추정돕니다.





자성대란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면
부산에는 예전에 수군진영이 있어서 부산진(釜山鎭)이라고 했습니다.

부산진에는 두 개의 성이 있었는데 하나는 좌천동의 증산이고,
또하나는 '시루대'라고 하는 산에 쌓은 성입니다.
부산진첨사로 싸우다가 전사한 정발장군을 모신 정공단이 있고,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쌓였던 성이
부산진의 본성(本城)이자 내성(內城)이고 모성(母城)입니다.

부산진인 본성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그들 나름의 성을 쌓게 되는데 증산 위에 쌓았다고 해서
'범천증산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증산왜성'이라고도 합니다.
 
그 본성에 대한 지성(支城)은 현재 범일동의 지금의 자성대를 중심해서 있었던 성을 말하는데요,
자성대성과 본성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므로, 본성(本城)은 외성(外城)이자 모성(母城)이 되고,
자성대성은 지성(支城)이자, 내성(內城)이자, 자성(子城)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성에 높직한 대(臺)가 돼있으니
주위에서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보통 일반적 견해입니다.




체육공원 표지가 보이자 동네 아이들이 체육을 합니다^^




우리나라 성은 수직인 반면
일본 왜성은 70도 각도를 이룬 석축성으로 축조되었습니다



자성대 진남관 올라는 가는 길이 호구입니다.

왜성은 입구를 '호구'(호랑이 입)라고 합니다.
 즉 호랑이 입으로 들어오면 잡혀 먹힌다는 것일까요?

이 곳이 진남대(장대)입니다





그리고 진남대 바로 옆에는
비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충장공 천만리장군비

임진왜란의 공신이었던 천만리장군은 원래 중국 영양사람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의 영양사로서 이여송과 더불어 조선에 출정하여 전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정유재란 때는 마귀장군(?)과 함께 참전하였는데
명군이 돌아갈 때 천만리장군은 조선에 머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렸고, 화산군에 봉책되었다고 합니다.
한때 왜군들이 매몰시켰던 것을 1947년 후손들이 되찾아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최영장군 사당이 있습니다.
 고려말 남해안 일대를 노략질한 왜구를 소탕하면서 이름을 빛낸 최영 장군의 용맹함과 청렴함,
구국정신이 하나의 신앙으로 승화되어 전국 각지에 사당이 세워지는데
이곳도 왜적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최영장군을 모셨습니다.
 부산에는 감만동, 수영동, 영도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으며
 매년 5월 5일 음력 단오날 향사를 지냅니다.




이 성을 지키는 냐옹이를 보았습니다^^


성 뒤론 하늘을 찌를 듯한 아파트가 보이네요^^


동문 진동문(鎭東門)

자성대에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선조 26년(1593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모오리 데루모도 부자가 중심이 되어 일본식으로 일본군이 쌓은 것입니다.
왜군은 고니시죠오(小西城)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루야마죠오(丸山城)라고도 했습니다.
우리는 자성대 또는 만공대(萬公臺)라고 불렀습니다.
명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장수 만세덕(萬世德)이 왜군이 물러난 뒤에
이곳 자성대에 주둔한 적이 있었고,
만세덕을 제사 지내던 제단인 만공단이 자성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 만세덕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우리나라는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을 넓게 다시 쌓고
사대문을 짓고 관아건물을 갖추어 수군의 부산진첨사영으로 삼았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자성대는 부산 수군 진영의 본영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재침을 대비하기 위해 자성대를 중심으로 수군요새지의 진영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남문을 종남문(鐘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서문은 부산진시장정도, 북문은 부산은행과 시민회관쪽으로 더 나갈 것 같고,
동문은 범일동과 문현동 사이의 하구교자리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동문을 나와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자성대교회가 나옵니다

 
북문 구장루(龜藏壘)

북문의 성은 보이지 않고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만 잇습니다


이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진남대(장대)와 바로 연결 됩니다

지금의 자성대 면적은 18,285평방 미터로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지정문화재 기념물 제 7호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7월 8일부터 1975년 2월 25일까지 정화 복원공사를 하여
동문(東門), 서문(西門), 장대(將臺)를 신축하여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장대를 진남대(鎭南臺)라 각각 명명하여 그 편액을 달았습니다.
이것 외에도 서문 좌우의 우주석(隅柱石), 천장군기념비, 최영장군 사당, 왜성의 성벽등의 볼거리가 있으며
산책로 곳곳에는 시민의 휴식공간과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실 복원할 당시 수치스러운 역사를 왜 다시 살리느냐라고 반대여론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엄연한 영토 침략이었기에
자성대 왜성은 이런 그들의 의도를 보여준 증거물이라는 뜻에서 복원을 하게 됩니다.






다음지도에 옜문헌을 참조하여 채색한 옜 모습(펜저의 국방여행)

동래부사접왜사도 -국립진주박물관-


부산진지성의 내부설명(펜저의 국방여행)

다음 지도로 보기-->http://dmaps.kr/45jb

내용출처
팬저의 국방여행 http://panzercho.egloos.com/10616446
국립문화재연구소 http://all.nricp.go.kr/search/search3.jsp?mcidx=904
토박이 김반장의 부산이야기 http://blog.naver.com/zerokim200/20056177049


파오인에 회원가입하시면 신문 1종 및 잡지 2종 , 파오뉴스 1개월이용권을 무료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