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
1907년12월 9일 순수민족자본으로 '인천공립보통학교'로 설립
강재구소령의 국가보혼처 현충시설
인천공립 보통학교로 1907년 12월 9일 설립이 되었다
1933년 인천제일공립보통학교,
1938년 인천창영공립심상소학교,
광복 후 창영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뀜
1996년 3월 차영초등학교로 이름이 변경됨
이미지 캡쳐 네이버 항공지도 바로가기-->http://map.naver.com/
일제 강점기시절 1924년에 건립된 이 교사는 일자형 단순 배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벽체 상단은 복공 화강석으로 아치형을 이루고 있으며
현관은 홍예석으로 만든 근세풍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으로 꾸몄다.
외형은 대칭 입면에 넓은 창과 평활한 면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직선을 강조하고 있고,
지붕에는 도모창이 설치되어 있다.
교실 내벽은 나무 졸대심을 넣고 흙을 발랐으며, 현관 복도 난간, 기둥등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창영 백년비건립사
육군소령 강재구 흉상
3·1운동 당시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어 역사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19년 3월 6일 아침부터 4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동맹휴학에 참여를 권유하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들의 돌발적인 동맹휴학과 만세운동은 청통같았던 일본경찰에게는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일본경찰은 학교 측을 압박하여 교사들이 제자들의 동향을 파악하여 인천경찰서에 유선보고를 하게 하였다.
3월 8일 밤9시 4학년 김명진, 박철진, 3학년 이만용, 손창신이 학교교사로 침입하여 교사들이 일본경찰에
보고하지 못하도록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전화기를 파손시켰다.
그렇게 동맹휴학이 계속 진행되자, 학교장은 학부모를 소집하여 24명의 주동학생을 처벌하겠다고 협박하여
등교하도록 하였다.
학부모들은 일본인교장의 협박에 못 견디고 각서를 쓰고 자녀를 학교에 등교하도록 햐였다.
다시한번 4학년 학생들은 교문에서 등굫사는 학생들을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일본경찰은 전화기 절단사건의 주동자를 수사하여 김명진, 박철진, 이만용, 손철신을 체포하여
구속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명진을 비롯한 학생들은 징역형, 태형등에 처해졌는데, 당시 18살 남짓의 학생들은
재판정에서도 의연함을 잃지않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현재까지 동맹휴학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4학년들에 대한 조명은 비춰지지 않고 있다.
인천 창영초등학교
인천 동구 창영동 30
032)770-6090